【명차 이야기 ⑪ 제너럴 모터스(G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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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차 이야기 ⑪ 제너럴 모터스(G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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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3.07.01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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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너럴모터스(GM)는 미국 디트로이트에 본사를 두고 있는 세계 최대의 자동차 메이커다. 1904년 윌리엄 듀런트가 GM의 모체가 된 뷰익을 사들인 것이 자동차 제국의 출발점이 되었다. 동부 뉴저지에 본사를 세워 본격적으로 자동차사업을 시작한 해가 1908년. 1909년 연간 생산대수는 2만5천대였다. 약 90년이 흐른 2001년에는 세계시장에서 850만대 이상을 판매함으로써 경쟁자인 포드와 크라이슬러, 그리고 일본 도요다를 저만치 따돌리고 최정상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1904년 뷰익을 모체로 출발해

기술자 출신의 창업주가 만들어 단일기업 형태로 꾸려 온 포드와 달리 GM은 천재적인 기업 사냥꾼인 윌리엄 듀런트에 의해 탄생했다. 듀런트는 미시간주 주지사의 손자로, 30대 초반에 마차를 팔아 100만 장자가 된 인물. 이런 그가 1904년 쓰러져 가는 뷰익을 인수한다.

듀런트는 1904년 연간 생산대수가 28대밖에 안 되는 뷰익을 손에 넣은 지 4년만에 8천820대 규모로 키워 냈다. 6천200대를 만들던 포드를 앞서는 규모다. 그의 경영전략은 ‘잘 팔리는 차, 고객의 입맛에 맞는 차를 만드는 것’이었다. 듀런트는 뷰익의 성공을 바탕으로 경영이 어려운 군소 메이커를 차례로 수중에 넣었다. 랜섬 올즈가 창립해 커브드 대시를 만들고 있던 올즈모빌(Oldsmobile)을 1908년 흡수하면서 회사이름을 ‘제너럴 모터스 컴퍼니’로 바꾸었다. 이후 캐딜락(Cadillac), 오클랜드(Oakland, 폰티액의 전신) 등을 차례로 합병해 GM의 기초를 다졌다.

제너럴 모터스로 바뀐 1908년 GM은 9천875대를 생산해 2천900만 달러의 판매고를 올렸다. 2년 뒤에는 생산대수가 3만 6천271대로 늘어났다. 하지만 곧 어려움이 닥쳤다. 1910년 모기업격인 뷰익의 판매부진으로 자금압박을 받기 시작했다. 듀런트는 은행에서 융자를 받는 대신 경영권을 넘겨주지 않으면 안되었다.

GM의 사장에서 물러난 듀런트는 시보레를 인수해 베이드 그랜드, 로얄 메일 등 대중차를 생산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시보레의 판매가 늘자 듀런트는 시보레의 주식과 GM의 주식을 맞바꾸기로 하고 재벌가의 후원을 얻어 5년만에 GM 사장으로 복귀했다. 이듬해인 1916년 GM은 회사체제를 새로이 정비하고 ‘제너럴 모터스 코퍼레이션’이란 이름으로 새 출발했다.

이 시기 GM은 피셔 보디, 델코, 하얏트 롤러 베어링 등의 부품과 액세서리 공장도 여럿 흡수했다. 특히 하얏트 롤러 베어링의 인수는 듀런트의 뒤를 이어 GM의 기반을 다진 알프레드 슬론이 들어오는 계기가 되었다. 1911년에는 수출 전담회사가 출범해 국제기업으로서의 첫걸음을 내딛었고, 1919년에는 GM 판매회사를 설립해 자동차할부금융도 시작했다. 현금 없이 신용만으로 차를 판다는 것은 당시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이에 힘입어 GM의 판매가 크게 늘어났다.

GM을 키운 알프레드 슬론과 하리 얼

1920년대 말 경제공황의 바람이 불어닥치자 GM은 또다시 자금난에 빠지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듀런트는 GM을 떠난다. 대주주였던 피에르 듀폰이 2대 사장으로 추대되어 잠시 경영을 맡았으나 23년 GM의 부속품 담당 부사장 겸 경영위원회 멤버였던 알프레드 슬론에게 경영권이 넘어갔다. 그는 1957년까지 GM의 책임자로 있으면서 회사를 탄탄하게 키워 냈다.

슬론은 듀런트가 실패한 원인을 방만한 경영 때문이라고 진단하고 조직개편을 단행했다. 모든 부서를 자동차그룹, 부속품 제조그룹, 부품 제조그룹으로 재편해 유기적인 연관을 갖게 하고 일사불란한 통제를 받는다는 것이 골자였다. 자동차그룹은 시보레, 뷰익, 올즈모빌, 오클랜드(현재의 폰티액), 캐딜락 사업부로 구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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